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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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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9 오전 9:42:25ㅣ조회:3564]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결심했나? 
정보 판단의 실수가 부른 국가적 재앙의 사례 연구
만일 日이 中-美와 전쟁하지 않고 만주와 한반도만 움켜쥐었다면, 대한민국은?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일본 장교단의 젊은 엘리트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보병대위가
大本營(대본영) 육군부 작전과로 발령된 것은
1939년 12월 초순이었다.

대본영은 戰時(전시)에 만드는 임시 지휘체제였다.
당시 대본영 참모총장은 皇族(황족)인 閑院宮載仁親王 元帥(원수)였다. 75세였다.


그는 세지마 대위가 신고하러 가니
“君(군)은 나이가 얼마인가”라고 물었다.
27세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군(君)은 아직 젊으니 먼저 상황의 전반을 잘 공부하세요.
그리고 항상 大局(대국)을 놓치지 않도록 하면서
자신의 見識(견식)을 함양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

세지마는 작전부 작전과(作戰課) 작전반의 소속이 되었다.
그는 먼저 國防用兵(국방용병) 전반에 대한 연구 및 작전관(作戰課) 전체의 총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대본영 육군부는 네 가지 문제로 苦心(고심)하고 있었다.
노몬한 사건의 뒤처리,
중일(中日)전쟁의 장기화,
육군군비 증강 계획의 재검토,
그해 독일이 시작한 유럽 전쟁에의 대응.

특히 1937년에 시작된 中日전쟁이 골칫거리였다.
일본군은 중국 대륙의 점과 선을 확보하고 있을 뿐
蔣介石(장개석)이 지휘하는 중경(重京)의 국민당 정부는 철저 抗戰(항전)을 선언,
미국 등 국제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세지마는 자신의 回想錄(회상록) <幾山河>에서
일본이 태평양 전쟁으로 끌려가는 계기는
중일(中日)전쟁이었다고 반성하였다.
세지마는 기밀서류를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중일전쟁 시작 1년 전
일본 육군의 천재로 불리던 이시하라 간지 작전과장이
작성한 문서를 읽을 수 있었다.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 만주국을 만드는 데 主役(주역)이었던
이시하라 대좌는 이렇게 썼다.

<일본은 모든 노력을 만주국 건설에 집중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육군은 소련의 위협에, 해군은 미국의 武力간섭에 대처하여야 한다.
다른 방면에서 우리의 國力(국력)을 소모하는 것을 절대로 피해야 한다.>

이시하라는
만주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이해하였으나
중국까지 침략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모험노선을 선택, 그 1년 뒤 中日전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939년 12월, 세지마가 대본영 육군부 작전과에 배속되었을 때,
작전과는 1940년도 육군작전계획안을 만들고 있었다.
세지마는 육군과 해군 사이의 협력 부문을 맡았다.
해군 작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西태평양을 침공하는 미국 함대에 대한 요격 작전]이었다.
세지마는 <태평양 전쟁의 주체는 해군이고, 육군은 해군의 작전을 지원한다>는 입장에서
<유사시 육군은 일부 병력으로 라바울을 점령한다>는 항목을 추가하였다.
해군과의 이런 인연으로 하여,
세지마는 나중에 연합함대 참모를 겸하게 된다.

당시 일본군의 통수권자는 소화(昭和)천황이었다.
대본영은 참모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천황의 재가를 얻어 작전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대본영의 참모총장은 육군을, 군령부(軍令部) 총장은 해군을 관장하였다.
통수권 운용의 핵심은 [국방用兵작전]이었고,
이와 관련하여 천황에게 上奏(상주)하는 일을 作戰課(작전과)에서 담당하였다.
전문가가 아닌 天皇(천황)이 독창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었으니,
사실상 작전과(作戰課)가 전쟁지도 업무를 주도한 셈이다.

1940년 7월27일 대본영과 정부의 협의체인 <大本營정부연락회의>는
<세계정세의 추이(推移)에 따른 時局處理要綱(시국처리요강)>을 결정하였다.
그때 독일은 유럽에서 전격전으로 프랑스군을 6주(週) 만에 궤멸시키고
영국군 40만 명은 덩켈크에서 九死一生(구사일생)으로 철수하여 돌아갔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 유럽의 주도권을 장악,
영국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서 결정된 <時局처리요강>은,
그 뒤 일본의 進路(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요강의 핵심은 유리해진 정세를 이용하여 中日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기회를 봐서 東南亞(동남아)를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고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對美(대미) 교섭을 추진한다.
동시에 네덜란드 령(領) 인도네시아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武力(무력)사용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 요강에 따라 1940년 9월,
일본은 독일 및 이탈리아와 함께 <三國(삼국)동맹 조약>을 체결한다.
이로써 일본은 영국과 미국을 잠재적 敵(적)으로 돌린 셈이다.


일본의 국가 지도부는 승승장구하는 독일의 國力(국력)과 戰力(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영국과 미국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세지마는 回想錄(회상록)에서 적고 있다.

이 무렵 히틀러는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에게
“우리 편에 서서 영국을 치자”는 제안을 한다.
프랑스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러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프랑코는 독일 및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 내전(內戰)에서 좌파에 이겼지만,
영국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였다.
영국이 비록 고립되었지만 항복하지 않고
정부를 캐나다로 옮기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히틀러를 만나러 오면서 고의로 두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였다.
히틀러를 驛(역)에서 기다리게 함으로써 그를 화나게 하여
회담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프랑코는 參戰(참전)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해놓고는,
독일이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프랑코의 교묘한 修辭(수사)에 질린 히틀러는,
“그 자와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생이빨을 빼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때 프랑코가 일본처럼 오판하여 독일에 협력하였다면,
2차 대전 이후 패전국 대우를 받아 스페인 사람들이 고생하였을 것이고,
프랑코도 정치적-육체적 생명이 끝났을 것이다.

일본의 誤判(오판)은,
급변하는 상황에서 戰時(전시) 외교에 실패하면,
국가와 국민이 불행해진다는 좋은 사례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선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이겼는데,
그 恩人(은인)을 敵(적)으로 돌린 것이다.
더구나 일본은 석유 등 중요한 戰略(전략)물자의 수입을 미국 회사에 의존하고 있었다.

事物(사물)을 좁고 깊게 보는 데는 능하지만
넓게 종합적으로 보는 데 약한 일본인들은
경제와 전술에선 잘 하지만
외교와 戰略(전략)에서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임진왜란도 그런 사례이다.

세지마의 회상록에 의하면,
作戰課(작전과)는 동남아 확보 작전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작전과장 오카다 대좌는
“우리가 연합함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無言(무언)의, 위대한 發言力(발언력)이다”고
말하였다.

세지마는 남방작전의 육군측 主務(주무) 참모로서 홍콩에 密派(밀파)되었다.
미쓰비시 상사원으로 위장한 그는,
상륙작전을 위한 지형(地形) 조사를 하였다.
작전과는,
싱가포르-말레이시아 작전,
인도네시아 작전,
홍콩 작전,
필리핀 작전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상륙작전이므로
戰略(전략) 급습, 制空權(제공권) 확보, 작전부대의 기계화가 필요하였다.
세지마는 작전반장의 지시에 따라
남방작전의 전반적인 종합계획 작성을 책임졌다.
세지마는 “미국과의 결전은 피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계획을 짰다고 한다.

대본영 작전과는
中日(중일)전쟁을 끝내기 위하여서는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지나 반도의 북부,
즉 지금의 하노이 일대를 확보하여 비행장을 건설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일본 군부가 <援蔣(장개석 지원)루트>라고 불렀던
<불인(佛印)루트>와 <버마-昆明(곤명)루트>를 봉쇄하기 위하여
하노이 근방에 비행기지를 두고 이 루트를 폭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프랑스 식민통치당국을 상대로 외교 교섭에 들어가
군대를 평화적으로 進駐(진주)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武力(무력)점령이 되었다.
1940년 9월26일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즉각적으로 반발하였다.
미국은 철강 제품의 對日(대일)수출을 금지시켰다.
영국은 잠시 닫아놓았던 <버마 援蔣(원장) 루트>의 再開(재개)를 통보해왔다.
美英(미영)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모두가 무리한 中日전쟁 때문이었다.

1941년 봄 세지마 대위는
작전반장의 보좌로서 작전의 전반, 특히 全軍(전군)의 병력 운용을 맡는 한편
북방반에 소속하여 만주 주둔 關東軍(관동군)을 시찰하였다.
그해 4월 일본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인 중립조약을 맺었다.
일본 육군은 전통적으로 소련을 主敵(주적)으로 보고 관동군을 重視(중시)하여 왔는데,
어느 새 미국을 主敵으로 돌려놓은 셈이다.
이런 방향선회의 가장 큰 판단 근거는,
독일군이 유럽을 장악하고 영국을 제압할 것이란 전망이었다.

그 독일군이 1941년 6월22일 소련을 기습 침공하였다.
5월부터 대본영에는 獨蘇開戰(독소개전) 가능성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6월6일 駐獨(주독)일본 대사 오시마는
히틀러를 면담하고 독일이 소련을 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일본군 상층부에선
이 기회를 이용하여 宿敵(숙적) 소련을 칠 것인가 동남아로 나갈 것인가,
즉 北進(북진)이냐 南進(남진)이냐의 격론이 벌어졌다.
육군성, 해군, 작전과장은 “이 기회에 북방의 부담을 줄이고 남진(南進)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육군의 작전부장은 “다년간의 현안인 북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북진(北進)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세지마의 회상록에 따르면,
독일의 소련 침공 소식에 접한 한 작전장교는
“히틀러가 오판했어!”라고 소리 질렀다고 한다.

대본영 육해군부(陸海軍部)는 독소(獨蘇)전쟁이란 새로운 상황에 대한 지침을 마련,
御殿(어전)회의를 통하여 천황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다.
만주의 병력을 증강하여 사태의 추이를 관찰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소련군도 병력을 증강하였다가 일본군의 北進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곤
독소(獨蘇)전선으로 다시 보냈다.
소련은 조르게 등 간첩망을 통하여 일본군의 방침을 알았다고 한다.


편집자 주
독일인 리하르트 조르게는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부상을 입은뒤
마르크스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됐다.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뒤 교사로 일하다
독일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후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 활동을 하다,
소련 첩보요원으로 발탁되어
영국-독일-중국 등에서 첩보활동을 했다.
중국에서의 첩보활동시
중국공산당과도 접촉했다.
그런 그를,
소련은 일본에 파견했다.
그는 독일의 소련 공격 날자,
히틀러의 소련공격시 일본의 대응방안 등
결정적 기밀을 빼내 소련의 국익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결국 그는 1941년 체포되어 44년 사형을 당했다.
그를 주제로 한 스파이 영화가 여러편 만들어질 정도로 거물 국제스파이였다.




일본 대본영은 남방작전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결론에 이르렀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점령작전을 위하여서는
인도지나 반도의 남쪽을 확보하여 항공기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인도지나는 프랑스의 남쪽에 세워진 비시 정부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엇다.
비시 정부는 독일의 압력을 받아 일본군의 진주(進駐)를 허용하였다.

1941년 7월 말 일본 제25군이 월남지역에 無血(무혈) 상륙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영국-네덜란드는
일본의 資産(자산)동결 및 대일(對日) 석유 禁輸(금수)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일본의 석유재고량은 1년분 남짓이었다.
독일을 믿고 달렸던 일본은 벼랑으로 몰렸다.
對美(대미 협상을 통하여 難局(난국)을 타개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對美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일본 고노에 총리는
미국측에 대하여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지나 이외의 지역으로는 진출하지 않는다,
필리핀의 독립을 존중한다,
미국은 일본과 정상적인 무역관계를 회복시킨다는 3개항을 제의하였다.
미국은 전제조건을 제시,
사실상 이 제의를 거부하였다.

일본은 9월6일 어전(御殿)회의를 통하여
“10월까지 우리의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국-영국-네덜란드에 개전(開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0월2일 미국은 일본에 회답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중국과 인도지나에서 완전 撤兵(철병), 삼국동맹의 사실상 무효화 요구였다.
대본영은 1941년 10월 말까지 작전계획을 완성하였다.
중국에서 철병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엔
일본이 너무 나가 있었다.

일본 지도부는
“경제봉쇄를 당하여 미국에 굴복하느니
스스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난국(難局) 타개의 핵심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油田(유전)지대를 점령,
석유자원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은 그 본질이 [석유전쟁]이었다.

고노에 내각이 美日(미일) 교섭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辭職(사직)하고
일본 육군상(陸軍相) 도조 히데키 대장이 1941년 10월18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천황(天皇)은 도조 총리에게
“9월6일 어전(御前)회의 결정에 구애받지 말고
내와(內外) 정세를 재검토하여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하였다.

일본 정부와 대본영은 11월2일
“武力발동 시기를 12월 상순으로 정하고 마지막 對美(대미)교섭을 시도하며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제휴를 강화한다”고
결정하였다.
그 사흘 뒤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3시 넘어까지 진행된 어전(御殿)회의는
육군과 해군의 작전계획을 통과시키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도조 내각은 11월7일 노무라 미국 주재 대사를 통하여
“日中간에 평화가 성립하면
2년 내로 일본군을 중국과 인도지나에서 대부분 철병한다”는
약속이 포함된 안을 제시하였다.
11월 초순 駐美(주미)대사 노무라는
헐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이것이 일본의 최대 양보안이다”고 설명하였다.

미국측의 반응은 차가왔다.
헐 장관은
“일본이 독일과 제휴하고 있는 한 미일(美日)관계의 조정은 불가능하다.
먼저 이 근본적인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협상할 수 없다.
미국의 평화정책과 히틀러는 相容(상용)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11월20일 일본정부는 대사에게
“우리의 최종안으로서
남부 인도지나 진주(進駐)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을 담은 을(乙)안을 제시하라”고
훈령하였다.
헐 장관은 이틀 뒤
‘인도지나 철병만으로써는 국면타개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하였다.
11월26일 헐 장관은 미국의 새로운 제안을 내어놓았다.

<헐 노트>로 알려진 이 제안은
“중국과 인도지나로부터 전면 철수,
중국에서 중경정권 이외의 정부는 인정하지 않는다,
삼국동맹의 사문화(死文化)”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이 문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최후통첩으로 간주,
12월1일 오후 어전(御前)회의에서 개전(開戰)을 결정하였다.

세지마는,
進攻(진공)명령-개전일(開戰日)에 관한 명령 등 작전(作戰)사무에 종사하였다.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寺內壽一) 대장에게
“히노데와 야마가타”라는 개전(開戰) 암호문을 打電(타전)한 것도 세지마 대위였다.
그는 이 開戰(개전)명령서를 새 붓과 먹으로 썼는데, 손이 떨렸다고 한다.

소화(昭和)천황은 전쟁으로 나아가는 데 대하여 주저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많다.
세지마는 戰後(전후),
후배인 아라이 기미오(제2차임시행정조사위원회에 참여)씨에게
“천황은 내전(內戰)을 걱정하여 개전(開戰)을 결단하였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천황이 군부를 누르고 외교적인 방법만 모색하였다면,
그리하여 중일(中日)전쟁에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군의 강경파가 2.26 사건과 같은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세지마는
일본의 전쟁 지도 기능이
정부와 군으로 양분(兩分)되어 있었고 통합 기능이 미비된 점을
회고록의 여러 군데서 비판한다.
그는 또 육군과 해군 사이의 정보 교류가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였다.
1942년 6월 일본 연합함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에 大敗(대패)하였는데,
해군은 육군측에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고
육군측도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사이 뒤돌아본다면
미드웨이 해전 직후 서태평양에 있어서 금후의 작전 전반에 대하여
양군(兩軍) 사이에 솔직한 토의를 했어야 했다.
당시 해군은 미드웨이의 실패를 회의에 올리는 것을 싫어하였고,
육군도 해군과 충돌하는 것을 꺼렸다.>

세지마는 회상록에서 이렇게 반성한다.

첫째, 중일(中日)전쟁을 일으키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 삼국(三國)동맹 체결과 프랑스령 남부 인도지나 진주를 하지 않았어야 했다.
1939년 가을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난 시기를 이용하여 중일(中日)전쟁의 대승적 해결,
즉 점령지로부터의 철병을 단행하였어야 했다.
1941년 10월 도조 내각 성립 때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대미(對美)교섭을 통하여
삼국(三國)동맹을 파기하고, 만주 이외의 지역으로부터 철병하였어야 했다.
물론 이 대결단은 국내적으론 군과 관련되는 일이고
미국이 응락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국가는 생존과 발전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발전에 치중하여 절도와 한계를 잃으면,
생존이 위험해진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도원리가 확립되지 않았다.
무리하게 발전을 추구하여 만주사변-중일전쟁을 일으키다가 보니,
생존이 어렵게 되었다.
필수적인 자원인 석유 등을 미국과 영국에 의존하면서
두 나라를 敵對視(적대시)하다가 전쟁으로 가서 지고 말았다.
만주를 제외한 중국 및 滿蒙(만몽)지역으로 세력권을 확대한 것은
발전의 한계를 넘는 폭주(暴走)였다.

세지마는 정보 판단의 실수도 지적한다.

일원적(一元的)인 국가통합정보기구가 없었다.
육군은 주로 대소(對蘇), 대독(對獨) 정보 수집에 주력하였다.
해군은 대미영(對美英) 정보수집에 열중하였다.
육해군이 다 군사적 정보수집에 치중하였다.
정치적-경제적 정보를 포함한 국력(國力)의 종합적 판단을 소홀히 하였다.
이런 정보 부족으로
우리 민족의 성격상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보다는
심정적이고, 희망적인 판단으로 흘렀다.
명치헌법에 의하여
국가의 통치는 천황이 총람하고
정부와 군통수부는 천황을 보필하게 되어 있었다.
정부-육군-해군이 국책(國策) 추진기관이었다.
총리-외무장관-육군 해군 장관-육해군의 통수부장의 여섯 명이 합의하게 되어 있었다.
시간을 다투는 문제를 결정하는 데는 너무 복잡하였다.
통수권의 독립과 現役(현역)무관제가 더욱 사태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서는
국가지도원리에 입각한 대영단(大英斷)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옛날 사람이 이야기하였다.
“이 세상에 不變(불변)하는 것은 없다.
다만 하나 불변(不變)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항상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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