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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1 오후 12:53:34ㅣ조회:2438]
6·25전쟁 前夜의 北과 南 
평화공세에 방심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과거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이나 60여년이 지난 2013년 지금의 한반도 안보상황은 여전히 두 가지 변수에 의해 작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한반도 주변을 둘러싼 국제정세 로서 미국과 소련(러시아), 그리고 중국이 남북한에 대해 어떤 정책과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195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여기에는 이들 국가와의 동맹관계·주한미군·안보 공약, 그리고 전쟁을 할 수 있는 수준의 무기 및 장비의 제공을 들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즉 남한의 국내 상황을 들 수가 있다.

여기에는 한국내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심리적 등 여러 가지 요인들과 또 이러한 것들을 북한이 어떻게 그들의 대남혁명전략(對南革命戰略)에 유리하게 이끌고 가느냐에 달려있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6·25전쟁을 전후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이들 국제정세와 남한정세를 이용하여 남침을 계획하고 이를 남침으로 연결시켰다.

국내외 정세를 유리하게 이용한 김일성의 전쟁준비

북한은 1948년 9월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이전인 1948년 2월에 이미 ‘남침용 군대(조선인민군)’를 창설하고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은 북한군의 편성, 무기체계 및 장비 등을 ‘공격용 군대’로 갖춘 후 곧바로 전쟁에 돌입할 수 있도록 사단급 제대의 기동훈련까지 마쳤다.

그렇지만 북한이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북한정권의 설계자이자 김일성의 정치적 후견인인 스탈린(JosephStalin)으로부터 전쟁승인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스탈린의 승인이 없으면 김일성은 단독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전쟁을 이끌어 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1949년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세는 김일성이 기대했던 것 보다는 훨씬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을 하겠다고 졸라댈 때 마다 스탈린이 좀 더 기다리라며 강조했던 남침할 시기가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김일성의 판단으로는 남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장 전쟁을 일으켜도 북한이 승리를 할 수 있는 듯한 유리한 상황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남침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김일성에게 이것을 빨리 전쟁을 개시하라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김일성의 남침을 향한 행보가 점점 빨라지면서 구체화를 띠게 되었다.

북한에게 다가온 첫번째 기회는 미국에 의해 주어졌다. 그것은 바로 주한미군의 자발적인 철수였다. 북한의 전쟁준비 및 전쟁수행에 있어서 절대적 지원자이며 후원자인 스탈린은 1949년 초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남침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던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유는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미군의 존재와 개입이었다.

그런데 1949년 6월 29일에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마지막 미군부대가 한국에서 철수한 것이다. 이제 한국에는 미국의 전투부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전쟁의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할 주한미군이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김일성과 스탈린이 남침 모의과정에서 가장 우려하며 주저했던 북한의 남침 도발시 미군의 개입에 대한 우려가 사라진 것이다.

북한에게 다가온 두번째 기회는 소련이 제공했다. 그것은 바로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이었다.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하자 그동안 미국에 비해 약세였던 핵무기 전략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했다.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계획 단계에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주한미군의 존재였고, 다른 하나는 핵무기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미군과의 전력상의 열세였다. 그런데 1949년 8월에 이 두 가지 문제가 거의 동시에 해결되었다. 소련은 만일 북한의 남침으로 미국과의 대결이 불가피할 때 미국에 대한 전쟁억지수단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핵무기였다. 오죽했으면 스탈린이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후 “소련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미국은 세계대전을 우려하여 참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을까.

북한에게 주어진 세 번째 기회는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이 제공했다. 오랜 국공내전(國共內戰) 끝에 모택동의 중공군이 드디어 중국대륙을 붉게 물들이며 공산화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때가 바로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지 불과 2개월도 채 안된 1949년 10월이었다.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거대한 대륙국가인 중공과 소련이 북한의 배후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중공이 내전에 승리하자, “이제 남조선을 해방할 차례”라고 전의(戰意)를 가다듬었다.

북한의 민족보위상 최용건도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조선인민은 소련과 중국 두 나라 사이에 이루어진 위대한 우호에 의해서 용기를 얻었고, 더욱 이승만 도당의 전멸과 조선으로부터 미제 침략세력을 국외로 축출하는데 승리할 자신을 얻었다”고 남한침략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김일성도 1950년 1월 17일 박헌영 외상이 주최하는 만찬석상에서 이 자리에 참석해 있던 북한주재 소련대사인 스티코프에게 남침에 대한 발언을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1950년 1월 30일 국제정세의 변화 등을 고려하여 김일성의 방문요청을 수락했다. 이후 김일성과 스탈린간의 남침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급기야는 전쟁으로 치닫게 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북한에게 다가온 네 번째 기회는 또 다시 미국에 의해 주어졌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전국 기자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 태평양에서 미국이 사수해야 할 ‘극동방위선’에 대해 언급했다.

애치슨은 이 연설에서 한국과 대만을 포기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태평양 상에서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시작하여 일본본토 및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선이라고 했다.

자연히 대한민국과 대만이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것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더 없이 좋은 기회로 받아 들이기에 충분했다. 김일성은 이러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1950년 신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북한 주민들의 전쟁의지를 불태웠다.

대한민국의 남침 대비

국제정세가 북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과 반대로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게는 불리한 상황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가 주한미군 철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하 이승만)은 정부 수립이후, 미국과의 연합을 뜻하는 연합국방(聯合國防)을 수립하고 한미군사동맹을 맺고자 노력했는데 미군이 철수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의 이런 노력은 1949년 6월 말 주한미군의 철수로 새로운 고비를 맞았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면서 한국에 방어용 군사장비 이양, 군사고문단 설치, 국군 100,400명(육군 65,000명, 해군 4,000명, 경찰 35,000명)의 군수 및 훈련지원만을 약속했다.

이승만은 1949년 5월 17일 주한미국대사 무초(John J.Muccio)를 통해 주한미군 최종 철수 사실을 통보 받을 때, 그에게 자신이 생각한 전쟁방지를 막기 위한 ‘한반도 방위전략 구상’을 말했다.

이승만은 주한미군 철수 대가로 미국에게 20만 군대를 무장시킬 장비와 1백대의 비행기를 요청했고, 북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 한국의 독립과 안전을 보장할 ‘한미 방위협정체결’을 요구했다.

그는 미국에게 서유럽에서의 대서양조약과 유사한 태평양조약(Pacific Pact)의 체결, 한미 또는 다른 국가를 포함한 상호방위협정 체결, 1882년 조선(朝鮮)과 미국이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중 미국의 한국에 대한 우호조항을 재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승만의 ‘태평양동맹(Pacific Alliance)’ 추진은 주한미군 철수가 임박할 때 나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그 연원을 두고 있었다. 그는 미국과 캐나다 등 유럽 및 북미(北美) 국가 16개국이 1949년 4월 4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북대서양조약에 대한 조인식을 갖자 태평양동맹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개인특사로 이미 도미(渡美)한 조병옥(趙炳玉)과 장면(張勉) 주미한국대사에게 태평양동맹 결성을 미국 정부에 제안하도록 지시했고, 그 자신도 자유중국의 장개석(蔣介石) 총통·필리핀의 키리노(ElpidioQuirino) 대통령과 이에 대한 협조체제를 유지했다.

특히 이승만은 1949년 5월 2일 “미국이 한국과 군사방위 동맹을 체결할 경우 한국의 국내 치안유지에 크게 도움이 되고, 아시아에서의 반공투쟁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방위동맹을 체결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주한 미국대사 무초도 1949년 5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은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 이래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 동맹을 체결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며 한국과의 동맹체결의 가능성을 부인했다.

이승만은 다시 북한과 우리 국민에 미칠 심리적 효과를 고려해 한국에 필요한 전력을 지원해 달라고 미국에 요청했으나, 미국은 한국의 산악지형에 전차가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이 북진통일에 이들 무기를 악용할 소지가 있다며 거절했다.

특히 로버츠(William L. Roberts) 주한 미군사고문단장은 “한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미국은 경제·군사원조를 모두 중단할 것이다. 미군이 철수할 때 한국군에게 이양한 무기는 전차와 비행기를 제외한 방어무기로 남한이 무력통일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승만은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한반도에서의 안보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또다시 진해(鎭海)를 미국의 해군기지로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이것마저도 미국측에 의해 거절되었다.

이처럼 전쟁 이전 이승만은 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으나 결론은 역부족이었다. 그가 구상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한반도 방위전략 구상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낮은 전략적 평가와 무관심으로 빛을 보지 못한 채 무산됐다.

이승만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지를 위해 태평양동맹·한미군사동맹·진해기지 제공·국군 전력증강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미국의 소극적 대한정책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25전쟁을 맞게 됐다.

북한의 게릴라 남파와 평화공세

김일성은 국제정세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는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에 대한 승인을 받고 남침 공격계획을 수립하고 여기에 모택동의 지원 및 동의까지 받아냈다.

실제로 모택동은 북한의 요청으로 중공군에 소속된 한인병사 약 5만 명을 북한군에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제 김일성이 해야 될 일은 남한이 남침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남한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북한은 먼저 남한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국군의 전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북한에서 훈련을 받은 ‘인민유격대’, 이른바 게릴라부대를 10여 차례에 거쳐 남파하여 한국 사회를 불안케 만드는 동시에 이를 토벌할 국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이중의 효과를 노렸다.

북한은 이들 게릴라부대를 1948년 11월부터 1950년3월 하순까지 약 10차에 거쳐 총병력 2,400명의 무장부대를 남파하여 남한에서 준동하고 있던 공비들과의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했다.

이들 중 일부는 6·25남침 때 북한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괴롭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에서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군이 동원됨으로써 정상적인 훈련을 실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후방지역에 부대를 배치함으로써 전력을 전국으로 분산시켰다.

북한은 모든 전쟁준비가 완료된 시점에서 평화공세를 전개하여 한국을 안심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경계의 눈초리를 38도선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북한은 그들의 장기인 심리전을 활용한 것이다. 북한은 그들의 대남혁명전선기구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하 조국전선)’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에 ‘평화통일’을 제의하며 심리전을 전개했다.

조국전선은 김일성의 통일전선전위기구로서 “미군 철수와 북한에 의한 통일”에 적극 동조하는 어용기구였다. 조국전선에는 북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가 총 망라 되어 있었다.

이들은 북한이 군사적 측면에서 전쟁준비를 거의 완료한 시점인 1950년 6월 초부터 ‘평화통일’을 전제로 유엔한국위원단과 한국의 정당 및 사회단체에 통일 달성을 위해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방식을 취했다.

특히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6·25발발 2주전인 6월 10일에 북한에 의해 감금된 민족지도자 조만식(曺晩植) 선생과 남로당 총책 김삼룡(金三龍)과 이주하(李舟河)를 교환하자고 거짓으로 제의했다.

한국정부는 이것이 북한의 상투적인 선전수단이라고 여기면서도 이들을 교환할 시기와 장소, 그리고 방법까지 북한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교환은 커녕 6월 25일 기습남침으로 답했다.

북한은 남한내 남로당원 20만의 봉기와 국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세한 그들의 전차및 항공 전력을 신뢰하였다. 또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해 준 남침 공격계획을 굳게 믿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불법 남침을 감행했다.

끝나지 않은 전쟁,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

6·25가 발발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의 상흔은 치유되지 않은 채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 국내 상황은 전쟁을 까맣게 잊고 있지 않나 하고 착각이 들 정도로 1950년 6·25이전의 상황과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형성되고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해도 결국 이 나라를 끝까지 지키는 것은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그럼에도 국내 안보상황은 썩 좋지 않다.

국내에서는 친북 좌익세력이 아직도 준동하고 있고, 북한은 핵무기 개발과 한국에 대한 도발발언을 연일 쏟아내며 그들의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최근에는 개성공단의 근로자들까지 철수시키는 극한 상황까지 왔다.

그런데도 이런 것에 우리사회는 우리 일이 아닌 양 태평하다 못해 무덤덤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외국에서더 난리다. 괜찮으냐며, 걱정하는 눈치다.

남한을 적화 하겠다는 북한의 대남전략은 60여 년 전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평해전·천안함폭침·연평도 포격 등을 일으키며 더욱 강화되었는데 우리들만 스스로 ‘심적(心的) 무장해제’를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이제 북한은 핵무기까지 개발해 놓고 미국까지 ‘위협’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우리 국민들은 자신감이 넘쳐 나는 것인지, 무관심 하는 것인지 태평스럽기만 하다.

60여 년 전에는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이 국가와 국민이 반공으로 똘똘 뭉쳤고 북한은 그것을 비집고 들어오기 위해 평화공세를 펼쳤는데, 지금은 반대로 북한이 오히려 도발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들은 핵무기까지 개발해 놓고 위협하는데도 우리는 태연하다. 자신감이면 좋겠으나 그것이 안보불감증에서 나온 것이라면 걱정이다. 친북좌익세력이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도 남의 일처럼 관망하고 있는 것도 심히 우려된다. 국가안보 면에서 이런 상황은 60여 년 전 그때보다 나쁘면 나빴지 좋은 상황은 결코 아니다.

역사를 회고해 보건대 국가의 운명은 외부의 적(敵)보다는 항상 내부의 적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것도 국민들의 안보관, 즉 안보해이가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 했다.

60여년전 무엇 하나 뚜렷하게 가진 것 없이 오직 투철한 애국심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정 그리고 반공정신으로 굳게 단결하여 조국을 수호 했던 선열들의 용기와 지혜가 새삼 그립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과거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는 미국 철학자 산타야나(GeorgeSantayana)의 말이 유난히 가슴 속을 후비며 파고든다.

북한의 도발을 잊지 않았다면 꼭 귀담아 들을 말이다.

남정옥(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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